(최영기 목사님의 글을 조금 수정했습니다.)
고통을 두려워하고, 피하고자 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본성입니다. 연세가 높은 분들이 몸이 아플 때 입원시켜 달라고 하고, 수술 받겠다고 하면 젊은이들은 “세상을 살만큼 사셨는데, 왜 저러시나?” 싶을지 모르지만, 오래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고통을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인간과 더불어 고난을 나누기 위하여 자원하여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는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고통을 다 겪으셨습니다. 아니, 어느 인간도 겪을 수 없는 고통을 다 겪으셨습니다. ‘사생아가 아닌가?’ 의심도 받았고, ‘사단의 하수인’ 이라는 비난도 받았고, 사랑하는 제자에게 배신도 당했고, 그리고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죽음을 겪으셨습니다.
인간의 고통과 고난은 오랜 세월 철학자들이 씨름했던 주제이고, 이 씨름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철학자들의 딜레마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신이 인간을 고통으로부터 구출할 수 없다면,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닙니다. 전지전능한데 인간을 고통 가운데 버려둔다면, 신은 선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동시에 증명해 보여주시고, 이 딜레마를 해결하셨습니다. 그리고 고난은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 잠정적인 것이고, 언제인가 고난과 고통을 인간의 삶에서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부활을 통해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고난을 감수해야만 하는 두 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고난은 잠정적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시면 고통과 죽음은 영원히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우리는 아직 고난으로 가득 찬 파괴된 세상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우리도 예수님처럼 고난을 감수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둘째, 사단을 대상으로 영적 싸움을 싸울 때, 어떤 때에는 고난만이 유일한 승리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악마의 일을 멸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다고 했습니다(요일 3:8). 예수님은 말씀 한 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있어라!’ 말씀 한 마디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없어져라!” 한 마디 하면 악마의 일을 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방법을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승리를 이루셨습니다. 고난을 통해서만 승리할 수 있는 영적 싸움이 있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한 영적 싸움에 참여하려면 인생의 목적을 행복에 두지 말고 사명에 두어야 합니다. 인생의 목적을 행복에 두면 주님이 우리를 고난에 초청하실 때 하나님을 원망하고 도망칠 수 있습니다. 인생이 목적을 사명에 두고, 천국의 상급을 기대하면서 살 때에만 고난의 초청에 응할 수 있습니다.
사실 고난과 행복이 상치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를 위한 고난의 끝에는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고난이 좋아서 받아드리신 것은 아닙니다. 장차 있을 기쁨을 위하여 수치를 참으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히 12:2). 그렇다면, 우리가 주를 위해 고난을 선택했다면, 더 큰 행복을 누리기 위해 지혜로운 선택을 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