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스턴서울교회 이수관 목사님의 글을 옮깁니다.)
한국 사람들이 신앙을 가지는데 방해가 되는 대표적인 것 가운데 하나는 아마도 제사의 문제일 것입니다. 제사를 중시하는 가정에서 자란 사람은 기독교를 받아드릴 경우 가정의 분란이 예상되므로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님과 마찰을 일으키기도 싫고 불효자가 되기도 싫은 마음 때문이니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따라서 제사의 문제는 한번 정도 생각해 볼만한 것이라 원장코너에서 다루어 봅니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포함해서 조상을 제사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깊은 전통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조상 제사는 기원전 500년경에 공자가 체계화시킨 유교에서부터 유래했고, 따라서 유교가 들어온 조선 시대부터 조상 제사는 시작되었습니다. 특별히 일반인들이 조상을 제사하는 것은 거의 조선 후기 이후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공자는 탁월한 사상가로서 가족도덕을 포함해서 정치이론의 단계로까지 유교를 발전시키지만, 삶과 죽음의 문제만큼은 전통 샤머니즘을 받아들여서 해결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사는 샤머니즘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유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사람은 죽으면 정신을 지배하는 혼과 육체를 지배하는 백이 분리가 되어서 혼은 하늘을 떠돌고 백은 지하로 내려간다고 믿습니다. 그러던 혼백이 자손이 제사를 지내주면 돌아와 결합해서 이 세상에서 자손과 만납니다. 그런데 혼백이 만나서 부활할 매개체가 필요하기 때문에 유교에서는 화장은 절대 안 되고 뼈를 잘 보관해야 합니다. 초기 유교에서는 조상의 두개골을 모셔다가 제사상에 올려놓았는데, 그것이 흉하다 싶어서, 그 다음에는 탈(가면)을 사용했고, 그것이 오늘날의 신주로 바뀐 것입니다. 따라서 신주라는 나무판자 안에서 부모님의 혼백이 부활하여 자손들과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유교는 사후 세계에 대한 개념이 없습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끝나 버리는 죽음이 불안하기도 하고, 이생에 대한 미련을 포기하기도 어렵지요. 그러다 보니 영원한 끝이 아닐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이 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를 잘 지내 줄 큰 아들에게 집착하게 되고, 그를 선호하다 보니 가족 간에 갈등이 야기되었습니다. 또 아무리 불효자라고 해도 제사만 잘 드려주면 되니 그 행위에 생전의 불효에 대한 위안을 받기도 합니다.
결국 우리 부모님들께 제사가 중요한 이유는 죽음 이후의 문제에 대한 목마름이고, 동시에 사랑하는 자녀들과의 영원한 이별을 받아드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사는 보다시피 전혀 그 해결책이 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부모님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천국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그곳은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 있는 곳이므로, 부족함 없는 모습으로, 서로의 상처 없이 다시 만날 것입니다. 그만큼 완벽한 해결책이 있는데, 거짓된 전통에 속아 영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보다 더 슬픈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렇게 조상 제사는 유교에서 나온 것이지만 오늘날에는 불교를 믿으시는 분들도 마찬가지로 조상 제사를 드립니다. 하지만 불교에서의 제사는 그 자체가 잘못된 개념임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불교는 기원전 6세기경 힌두교의 본산인 인도의 한 나라의 왕자로 태어난 싯다르타에 의해서 창시된 종교입니다. 그는 카스트제도에 의한 인권 유린의 실체를 보면서, 또 염세적인 힌두교가 만들어 내는 민생의 도탄에 염증을 느껴서 왕자의 자리를 버리고 수행한 후에 불교를 창시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힌두교의 문제점을 극복하고 잘 보완해 냅니다.
따라서 힌두교가 카스트제도를 세웠다면 불교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을 주장했고, 힌두교가 3억 3천만이 넘는 신들로 인간을 옭아매었다면 불교는 신 자체를 거부했습니다. 물론 지금의 불교는 부처님을 신으로 격상시키고, 많은 신들을 두고 있는데 그것은 원래 불교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불교의 사상의 핵심은 실제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현실세계는 존재하지 않지만, 동시에 그 존재하지 않는 상태는 현실세계와 동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색즉시공이고 공즉시색입니다. 따라서 있다고 주장할 필요도 없고 없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물위에 떠있는 거품은 존재하지만 사실은 없는 것이고, 그렇지만 분명히 있는 것처럼 말이지요. 자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없는 것인데, 나의 의식과 경험, 기억들을 가지고 내가 있다고 주장하고 거기에 매달리는 것에서 모든 고통은 존재합니다. 그 헛된 것들을 있다고 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없다고 하지도 않을 수 있는 그 있는 그대로 받아드리는 깨달음이 해탈입니다.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죽음 이후의 세상은 없다고 해야 정상입니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죽음 이후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토록 싫어했던 힌두교의 윤회 사상을 그대로 받아드렸습니다. 아마도 그 문제만큼은 깨달음으로 해결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윤회 사상은 불교의 가르침과 전혀 맞아 들어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불교의 설명에 따르면 다시 태어날 만한 실체라든지 자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윤회자체가 불교 사상과 모순됩니다.
어쨌든, 윤회 사상에 따르면 사람이 죽으면 7일 만에 다른 무엇인가로 새로 태어납니다. 그런데 새로 태어날 조건을 받지 못하면, 그 다음 7일 만에 무엇인가로 새로 태어납니다. 이것이 길어지면 7일씩 일곱 번까지 반복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 49일 동안에 뭔가 좋은 존재로 태어나라고 빌어주는 것이 49재입니다. 그렇다면 49일이 지나면 그 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실은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었지만 말입니다. 그렇다면 돌아가신 분을 기억하고 기릴 수는 있겠지만 그 분을 위해서 음식을 차리는 그 자체는 모순이지요. 그 분은 지금 뭔가 다른 존재로 어디선가 살고 있을 텐데 말입니다. 따라서 불교를 믿는 분들에게는 제사 자체가 모순입니다.
물론 부모님이 가지고 있는 전통에 대한 오랜 습관과 그것에 두었던 감정적인 애착을 한순간의 논리로 뒤집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사실을 알고 있을 때, 부모님들이 언젠가 기독교를 받아드리려고 할 때 혹시 제사가 마음에 걸려 하신다면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날이 올 때까지 그 분들을 사랑으로 섬겨드리고, 동시에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 느끼는 행복을 꾸준히 말씀드리고, 정말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무엇보다도 ‘우리 천국에서 다시 만나야 해요’ 라는 말씀을 자주 드리면 부모님의 마음은 변할 것입니다.